대테러작전 - 모가디슈 구출작전(모가디슈 인질구출작전의 개요와 구출방법, 모가디슈 구출작전의 평가)
1) 사건 개요
1977년 10월 13일, 승객 및 승무원 87명을 싣고 스페인의 휴양지인 마요르카 발 프랑크푸르트 행 루프트한자 소속의 여객기가 무장한 2명의 여성을 포함한 4명의 테러리스트에게 이륙 50분 후 공중 납치되었다. 납치범들은 급유를 위해 로마 공항에 착륙하여, 인질의 석방 대가로 11명의 적군파 테러리스트 석방과 1천 5백만 달러의 현금 지급을 요구했다. 요구 조건을 밝힌 후 납치범들은 로마를 이륙하여 키프로스 라나카 공항에 착륙했고, 독일 정부는 같은 유형의 항공기에서 모의 구출작전 훈련을 마치고 32명으로 구성된 2개조의 특공대가 키프로스에 도착했다. 키프로스 주재 PLO 대표의 여자 및 어린이 승객의 석방 요청을 거부한 납치범들은 독일 GSG-9특공대의 키프로스 도착을 알아낸 직후 엔테베식 구출작전을 피하기 위해 10월 14일 키프로스 공항을 이륙했다. 납치범들은 베이루트, 다마스커스, 바레인, 두바이를 거쳐 아덴에 착륙했다. 예멘 정부의 착륙 거부가 있었으나 아덴에 비상 착륙을 한 직후 테러리스트들은 독일 정부의 요구 조건 수용이 늦어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보복과 인질들에 대한 살해의 의지를 표명하기 위해 전체 승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장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아덴에 도착한 10시간 후 납치범들은 부기장을 협박하여 10월 17일 소말리아의 모가디슈에 도착했고, 살해된 기장의 시체는 활주로 밖으로 내던져졌다. 납치범들은 더욱 잔인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승객들의 석방이 이루어질 경우 제3국으로 출국을 보장한다는 소말리아 정부의 제안을 거절하고, 승객들을 포박하고 휘발성 물질을 몸에다 부어 불을 지르기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2) 인질 구출작전
평화적인 사건 해결이 불가능할 때를 대비해 서독 정부는 사건 발생 직후부터 대테러 특공대인 GSG-9의 투입을 고려하여, 납치된 루프트한자 항공기와 동종(同種)인 여객기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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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 사격이 가해졌고, 그들은 수류탄을 던지면서 반항했다.
납치범들이 던진 수류탄은 좌석 밑으로 떨어져 인질과 특공대에게는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했고, 그들은 특공대들에게 사살되었다. 인질 구출작전은 단지 공격 개시 6분 만에 종료되었고, 구출 과정에서 단지 3명의 인질만이 부상을 당했다.
3) 모가디슈 작전 평가
GSG-9의 모가디슈 인질 구출작전은 이스라엘의 엔테베 작전과 함께 대테러 작전에 커다란 분수령이 된 성공적인 작전이었다. 엔테베 작전이 적대 관계에 있는 국가에서의 작전이었기에 조금은 어려운 상황이었고, 모가디슈 작전은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국가에서 감행된 작전이라는 것이 차이점이다.
모가디슈 작전의 성공 요소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소말리아 정부의 라나카 공항 외곽 지역 경비 등의 적극적인 협조가 성공의 한 요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소말리아 정부의 협력을 이끌어 낸 것은 국제 사회의 대테러 노력의 결실이었다는 것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개인 특사를 보내 바레 소말리아 대통령에게 GSG-9에 대한 모든 협력과 지원을 촉구했다.
둘째는 서독 정부의 테러리즘에 대한 철저한 대비와 대테러 특공대의 활성화에 대한 노력의 결과이다.
서독은 GSG-9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계속해 왔고, GSG-9는 이러한 정부의 지원에 부응하기 위해 끊임없는 훈련과 대테러 전술 개발에 최선을 다해 왔다는 것이다. 특히, 특공대장인 베게네르는 엔테베 작전에 참가하여 실전 경험을 쌓았고, 이러한 경험을 통해 미비한 부분을 개선하는 노력을 해왔다. 셋째는 평시에 대테러 특공대 간에 유지해 온 긴밀한 협력 관계가 실제 상황에서도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모가디슈 작전에 영국의 SAS 대원인 모리슨(Alistair Morrison) 소령과 데이비스(Barry Davies) 상사가 직접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SAS가 제공한 신경무능화 작용탄이 테러리스트의 초기 진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인질 구출 과정에서 단 한 명의 사망자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