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의 철학사상
1. 시대적 배경
매월당은 세종 17년(A.D 1435)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조선의 태종까지는 여말의 혼란을 새로운 왕조에 의한 心氣轉煥과 紀綱刷新에서 주로 법과 제도를 중심으로 정리하는 治的이었다. 그리고 일단 정비된 체제에까지 이르렀던 것이거나 여조 이래의 정치이념이 달리 획기된 어떤 실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비교적 정리된 여건에서 조선의 황금기가 일찌기 다음 세종대에 위대한 抱負와 善政으로 출현하였다.
세종은 재위 32년 간에 안으로는 문화를 부흥시키고, 밖으로는 변경을 녋혀 역사상 위대한 임금으로 찬란한 업적을 남긴 인물로 유명하다. 세종의 治世는 민족문화의 획기적인 발전을 보게 한 시대일 뿐 아니라 유교문화의 터전을 굳게한 시대라고 할 것이다. 이때 대륙에서는 明의 기초가 확립되어 元의 멸망후 처음으로 동양정국에 안정을 가져왔고 조선도 태조, 태종의 왕권확립으로 질서의 안정을 보게된 시대적 배경 아래 훈민정음을 제정하였고, 현재의 한민족의 강역을 확정하였으니 세종을 ‘海東堯舜’으로 칭하는 것도 과장이 아니라 할 것이다.
조선은 세종대왕의 황금기를 맞고서도 살벌한 파문을 겪으면서 基業이 공고해져 가는 과정을 밟게 된다. 단종을 물리쳐 제 7대 왕위를 차지한 세조는 충절인사와 권신, 그리고 왕실 형제까지도 살해하기에 이른 거사로서 簒位하였다. 태조의 왕자들 사이에 있었던 난에 통하는 유형에 이어 권신분열의 편당에 큰 몫을 차지하여 후일에 야기된 사회의 여러 가지 요인이 이에 함축되었었다. 세조의 왕위찬탈에 있어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신하들 중에 세조를 도와 권력을 잡은 자들도 있으나,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죽음을 당한 자들이 있었으니 곧 死六臣으로 불리고 있다. 그리고 죽지는 않았으나 不事二君의 절의를 지켜 조정에 나가지 않은 이들이 있으니 바로 生六臣이 그들이다.
본래 조선유학의 학맥을 논하자면, 고려왕조에 절의를 지킨 길재, 정몽주를 위시한 절의파를 계승한 사림파와 조선의 창업에 가담한 관학파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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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을 전개하고 있다. 주자는 형상은 없지만 理는 존재한다는 存有의 의미로서 無極而太極을 설명한다. 매월당은 물론 “陰하고 陽하며,動하고 靜하는 그 理의 극이 없음을 태극이라고 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天道,天命流行의 生生不息하여 始終을 초탈한 것으로 무극이태극을 해석한다.
이로써 보면 매월당의 실체관은 流行, 變化의 동태적 성격이 있음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매월당에 있어서 태극은 음양의 所以然의 理라기 보다는 음양과 원융한 의미가 있다. 이것은 주렴계의 태극론과 상통한다. 즉 매월당의 太極陰陽也, 陰陽太極也는 염계의 陰陽一太極也와 상통한다고 보겠다. 이것은 엄격히 보면 주자의 태극론과는 다른 것이다. 염계의 體得에 의거하면 우주의 생성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창조실체로서의 태극은 ‘바로 존유하면서 동시에 활동하는 것’이며, 주자에 있어서는‘다만 存有할 뿐, 활동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생생불식한 실체관은 명도에 있어서의 道亦器, 器亦道와 일치한다고 아겠다.
매월당에 있어서 태극은 誠과 일치하면서 또한 生理, 生道, 實理로 나타난다. 生生之道나 生生之理가 不息함으로 無妄,즉 誠으로 나타나고 이와 같이 불식무망하는 生道, 生理가 實理와 일치하는 것이다. 명도의 理觀이 생생불식하는 소이로서의 生理를 드러내고 이 生理로부터 易體를 지적해내고,易體를 특별히 드러낸 이유가인간의 天道에 대한 識을 요망한 것이라 한다면, 매월당은 誠을 드러낸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不息으로 誠을 천도와 인도의 합일처로 보고 있으며,誠體의 不息으로 不息으로부터 理가 하나임을 나타낸다. 一理가 유행하는 가운데 事事物物에 각기 分殊之理고 나타나는 理一分殊를 말한다. 이상으로 매월당 理論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보자.
첫째: 매월당 理論의 배경은 선진유학과 송대성리학의 合一에 있다 하겠다.
둘째: 朱子, 伊川의 所以然之理보다는 염계, 명도와 같은 理氣圓融의 원교적 실체관으로서의 理學이라 할 수 있겠다.
② 氣論
매월당은 천지지간이 모두 氣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