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관계
대한민국과 미국의 관계는 19세기 중반 조선의 통상을 요구하던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8년 대한민국은 미국의 원조로 민주 정부를 수립하였고 그 이래로 매우 광범위하게 발전하여 왔다. 미국은 한국 전쟁(1950년~1953년) 당시 유엔군을 조직하여 대한민국 편에서 참전하여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고 휴전 이후에도 주한 미군이 계속 주둔하고 있고 대한민국은 주한미군에 의한 군사적 보호속에서 매우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그 후 40여 년 동안 대한민국은 극적인 경제, 정치, 군사적 발전을 경험하였고 그만큼 미국에 대한 의존도는 감소하였다. 제5공화국 때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도 있었고, 2000년대 들어서 주한미군 한강 독극물 무단 방류 사건,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등으로 반미 감정이 고조되기도 하였다. 2007년 한미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었고 문서 공개 이후 상당한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2008년 현재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논란을 겪고 있다. 현재, 양국은 군사적, 외교적 뿐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깊고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주미 대한민국 대사관은 1949년 워싱턴 D.C.에 개설되었고, 현재 대사는 2009년에 임명된 한덕수(제22대)이다.
최근 한국의 중국 및 유럽과의 교역량 확대로 교역량의 순위는 바뀌었으나 여전히 교역량은 많다. 1990년대까지 심한 대한 무역적자로 인한 통상마찰이 있었으며, 미국은 다각적인 방법으로 한국에 대한 수출의 증가에 주력하였다. 이에 따라 1990년대부터 무역수지가 역전되어 한국이 외환위기로 인하여 IMF 구제금융을 받은 1997년까지 최대 120억 달러에 육박하는 흑자를 보았으나, 1998년부터 다시 적자 상태에 놓여 있다.
미국은 이미 냉전 종식 이후 남북한 관계의 해빙에 따라 1991년 `한반도 비핵화선언`을 발표하면서 한국 내 전술핵을 철수하고 탈냉전에 따른 미군병력의 축소를 단행하고 있었지만, 한국과 미국과의 관계는 군사동맹관계를 바탕으로 굳건하게 이…(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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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마찬가지로 해적국가이거나 오랑캐 나라로 생각하였던 미국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게 되면서 1882년(고종 19) 전문(全文) 14관(款)으로 이루어진 한미수호통상조약(韓美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883년 5월에는 초대 미국전권공사 H.푸드가 입국해서 비준서(批准書)를 교환하였고, 조선정부에서도 같은 해 6월 전권대신 민영익(閔泳翊), 부관 홍영식(洪英植) 등을 미국에 파견하여 그 후 조선정부의 외교노선이 연미정책(聯美政策)으로 기울어져, 한반도에서 청국일본러시아 세력을 견제하는 데 미국의 도움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당시의 고립외교정책(비간섭정책) 때문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여 ‘한국의 정책에 간섭하지 말라’고 미국공사에게 훈령을 보낼 정도였다. 또한 미국은 1898년 에스파냐와의 전쟁 결과로 차지하게 된 필리핀을 중시하여 1905년에는 태프트 미국 육군장관과 일본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郞]가 회담을 열고 ‘미국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지배의 우월권을 인정해 주고, 그 대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을 인정한다’는 비밀협약이 성립됨으로써 미국은 한반도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일본의 한국강점을 방관한 미국은 1905년 11월 한일 간에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이듬해 3월 다른 외국공관보다 앞서 공관을 철수시킴으로써, 그때까지 23년에 걸쳐 맺어졌던 양국 국교는 단절되었다. 그 사이 양국의 경제교류도 미미하여 1895년의 경우 한국의 총수입액 416만 달러 중 대미수입은 약 7만 달러로 전체수입액의 1.7%에 불과하였고, 같은 해 미국의 총수출액 9억 2,100만 달러 중 대한수출은 총액의 0.013%에 지나지 않았다.
미국이 한국에서 취득한 경제적 이권을 보면 1896년 경인철도부설권(뒤에 일본에 양도), 운산금광 채굴권, 서울 수도시설권 등을 획득하였고,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하여 전기를 공급하고 전차를 들여왔으며, 영국과 합작으로 인천에 연초공장을 세운 정도였다. 1897년을 기준으로 한국에 입국한 미국인은 47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