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
목 차
1 일본군 위안부제도
2 시대별 개관
3 활동일지
4 피해자증언
5 밀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도서
6 국내외 관련 단체
7 재판자료
8 피해자 지원
9 최근기사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나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고 명백한 일본의 잘못이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현재 위안부 피해자들의 나이가 많이 들어서 시간이 더 지나면 증언을 하시고 있는 할머니들이 돌아가시게 되면 만약 이 사건이 해결된다 할지라도 보상을 받아야 할 분들이 더 이상 계시지 않게 된다는 점도 더욱 안타까운 문제로 보여졌다. 그래서 레포트를 준비하면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조사해보았고 일본군위안부제도가 무었인지 그리고 시대별로 어떤 변화를 격어왔고 현재에는 어떻게 해결을 위한 노력을 하고있는지 그리고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와 같은 피해자의 증언과 현재 살아계시는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지원 문제 그리고 관련기사들과 해외동향까지 여러 가지로 일본군 위안부에대해 조사해 보았다.
1. 일본군위안부제도
1-1, 일본군 위안부란
일본이 만주사변(1931.9.18)을 일으킨 이후부터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1945년까지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설치한 ‘위안소’에 강제동원되어 일본군의 성노예 생활을 강요단한 여성을 지칭하는 것이다. 문헌과 증언 속에서는 작부, 특수부녀, 추업부(醜業婦), 예기, 창기, 여급 등의 호칭으로 나타나고, 위안소도 육군오락소, 구락부, 군인회관, 조선요리옥 등의 호칭으로 불렸다.
1-2. 일본군 ‘위안소’의 형성과 동원규모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에 침략전선을 …(생략)
|
동원 과정에 협조했다. 업자들은 모집인을 이용하거나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여성들에게 접근하였다. 취직이나 돈벌이를 미끼로 여성들을 끌어 모으거나 협력과 폭력을 이용하여 동원하기도 하고, 심지어 납치하기도 했다. 총동원체제와 전쟁을 수행하는 데 ‘위안부’가 필요하다는 일본군의 요구가 이러한 물리적 폭력을 허용했다.
태평양전쟁 발발(1941년) 이전에는 ‘도항증명서’를 받아 국외의 위안소로 이동하였다. 수속에 필요한 절차는 모집인이 공권력의 협조를 받아 도맡아하였다. 이 과정에서 호적이 위조되는 일도 있었다.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에는 ‘군증명서’를 통해 국외의 위안소로 이동하였다. ‘군증명서’는 모집인이나 인솔자가 소지했으며 일본군은 이동에 필요한 각종 편리를 제공하였다.
1-4. 위안소 생활
위안소의 유형 및 설치시기와 지역에 따라 피해자들의 생활 형태는 다양했다. 동원된 여성들은 군인이 직영하거나 민간업자가 경영하는 위안소에서 생활했다. 민간 업자가 경영하는 경우라도 군이 위안소의 허가와 경영을 통제했기 때문에 사실상 군의 관리 아래 놓여 있었다. 직영위안소나 일본군이 새롭게 점령한 지역일수록, 전쟁 막바지로 갈수록 일본군의 통제가 강화되었다.
피해자들은 위안소에서 대부분 일본식으로 이름을 개명하여 사용했다. 외출이 허락되지 않거나 일정한 시간이나 범위 내에서만 외출이 가능했다. 작은 섬으로 동원된 경우에는 탈출이 불가능했으므로 외출에 별다른 제한을 받지 않았다.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직접 돈을 받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신 병사 몇 명을 상대했는지 증명할 수 있도록 오늘날의 전표와 비슷한 군표(軍票)나 금권(金券)을 받았다. 나중에 표를 돈으로 바꿔준다는 말을 듣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업주가 관리를 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대가를 받지 못한 경우가 많다. 오히려 동원 당시 이동비, 의복비, 식비 등과 위안소 생활비 등을 대가에서 공제하여 빚을 떠안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군위안부로 동원된 여성들은 성병 예방을 위해 콘돔을 사용하고 정기적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