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 - 중세 시대 1485년경까지 문학
43―ca. 420: 로마의 브리튼 침공 및 점령.
ca. 450: 앵글로-색슨 정복.
597: 성 오거스틴 켄트 도착, 앵글로-색슨 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시작함.
871―899: 알프레드 대왕 통치기간.
1066: 노르만 정복.
ca. 1200: 중세영문학 시작.
1360―1400: 중세영문학의 절정기: 제프리 초서의 작품들, 농부 피어즈, 거웨인 경과 녹색의 기사 등.
1485: 윌리엄 캑스턴이 영어로 인쇄된 최초의 서적들 중의 한 권인 토마스 말로리 경의 아서 왕의 죽음을 인쇄함.
중세 시대는 대충 로마 제국의 붕괴로부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중세”(medieval)라는 형용사는 라틴어의 medium(middle)와 aevum(age)에서 유래한 낱말이며, 중세 시대 동안에 만들어지고 씌어진 것이면 무엇이든 다 가리키는 말이다. 르네상스는 19세기의 역사가들과 비평가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그들은 그 낱말을 라틴의, 특히는 그리스의, 학문과 문학의 “재생” 내지는 부흥에서 비롯되는 창조성의 분출과 연관시켰다. “종교개혁”은 16세기 초에 시작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지고한 권위를 거부한 강력한 종교적 운동을 가리킨다.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145세기 동안 유럽 전체로 확산된 것으로 여겨져 왔다. 반면에 종교개혁은 독일에서 시작되어 빠른 속도로 유럽 전체에 걸쳐 다소간에 영향을 끼쳤다. 르네상스 혹은 재생이라는 개념은 그 이전 시대에 어떤 것이 잠복했거나 부족했음을 의미한다. 보다 최근에는, 중세 시대와 그 이후 시대에 대한 이해에 두 가지 비배타적인 경향이 있어 왔다. 일부 학자들은 중세 시대와 지금은 초기 근대 시대(Early Modern Period)라고 일컬어지는 그 이후 시대 사이의…(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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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앵글로-노르만 인들의 관심 때문에, 영국뿐만 아니라 서부 유럽의 모든 나라들이 켈트 문학에 등장하는 아서라는 이름의 전설적 영웅에 매료되었다. 아서 왕과 그의 기사들은 중세 프랑스, 영국 그리고 독일 문학의 주요한 주제가 되었다.
영국에서의 문학 활동은 중세 시대 전반을 통하여 구어적 문어적으로 수행되었다. 그러나 영국 문학의 고유성에 대한 인식과 긍지는 14세기 후반 이전까지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1336년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의 왕위계승권을 강경하게 주장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했다. 그 전쟁은 백 년 동안에 걸쳐 간헐적으로 계속되었고, 마침내 영국인들은 칼레 항구를 제외한 프랑스의 모든 영토로부터 쫓겨났다. 이 전쟁과 영토상실의 한 결과는 영국의 귀족들로 하여금 영국적인 유산과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보다 날카롭게 했다는 것이다. 14세기가 끝나갈 무렵 영국은 마침내 불어를 의회와 수많은 공식적 서신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언어의 지위에서 내쫓았다. 비록 고위 귀족들은 계속해서 불어를 우선적으로 사용했지만, 그들은 명백히 2개국어병용자들이었다. 이것은 초기 노르만 왕들의 일부가 영어를 전혀 몰랐던 것과는 대조되는 점이었다. 영어로 문학적 성취를 이루기 위해 패트론을 구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있었다. 초서(1400년 사망)가 자국어로써 불어 및 이태리어와 겨루려고 했던 결정은 영어의 지위에서 일어나고 있던 변화를 말해주는 것이다. 초서의 작품들은 대망을 품은 문학의 매체로서 영어의 위신을 크게 강화시켜 주었다. 15세기 시인들은 영국의 언어를 아름답게 장식한 그에게 갈채를 보냈고, 이후의 작가들은 그를 영국의 호머 또는 영시의 아버지라고 일컬었다. 그의 친구 존 가워(1330-1408)는 그의 마지막 대작인 연인의 고백(Confessio Amantis)제목은 라틴어지만 영어로 씌어졌다을 내놓기 전에 불어와 라틴어로 된 장편시들을 쓰기도 했다.
주된 세 부분 중에서 가장 긴 시기인 14 5세기 중세영문학은 이리하여 연대기적 언어적 구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