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 알제리전쟁 - 프랑스 ‘과거청산’의 지적(知的) 계보와 구조
목 차
머리말
1. 1950년대 지식인의 항의
2. 1990년대와 1950년대의 연속성과 변화
3. 이민자 사회와 지식인
4. 1990년대 알제리의 폭력에 대한 지식인의 대결
머리말
알제리전쟁(1954-1962)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었다.1) 막강한 해외 제국을 통치하는 서구 강대국과 그 힘과 논리에 종속되어 한 세기 이상 철저히 지배당한 약소민족 사이의 전면적인 대결이 알제리전쟁이었다.2) 그 전쟁은 전 날의 제국(帝國)인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1950년대 중반의 새로운 국제 질서에 적응하고, 비효율적인 기존의 제도를 버리고 근대화 작업에 나서야 했던 정치적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그 전쟁은 전쟁이 벌어지게 된 경위와 전쟁 자체가 지닌 모순으로 인해 모든 국제정치와 모든 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원천적인 문제를 프랑스 사회에 제기했다. 알제리는 영국, 프랑스가 19세기부터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거느렸던 여러 지역의 여러 유형의 식민지들 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식민 지배세력에 의해 완전히 통합을 당해 이미 1848년 제2공화정기에 프랑스의 해외 도(道)로 전락한 존재였다.3) 따라서 1789년 혁명 이래 인간애와 보편주의를 주창해 온 프랑스 지식인은 인종과 종교와 문명이 다른 민족을 마치 브르타뉴와 알자스-로렌과 마찬가지인 듯 소유하고, 그 소유에 집착하는 현실이 정당한가 하는 문제를 피해가기 어려웠다. 전쟁은 카빌(Kabyle)의 산악과 사하라 사막과 알제의 카스바(Casbah)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식민주의라는 서구 문명의 비이성적 원천이 지금 문제시되고 있음을 일군의 좌파 지식인들은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4) 알제리전쟁에서 소수이나 예리한 프랑스 지식인들이 자기 나라의 교전(交戰) 상대인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을 공개적으로 지원하는 어쩌면 기이한 현상은 이러한 자의식에서 비롯되었다.5) 1960년대 후반의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의 반전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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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정치와 프랑스의 지식인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밀착되어 있다는 미국 역사가 토니 쥬트의 명제의 적합성을 다시 보는 것 같은 대목이다.9) 2000년, 의회에 조사위를 설치하여 알제리전쟁에서 자행된 고문 행위를 재검토하자는 공산당 안이 부결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러한 일시적 조사보다는 역사적이며 학구적인 작업을 통해 문제를 해명하는 것이 프랑스와 알제리 양자의 선린 관계를 위해 보다 근본적이며 우선한다는 설명이었다.10) 이는 비시(Vichy) 정부 아래 유태인들이 박해를 받은 사안에 대해 프랑스 정부가 사과한 것과는 거리가 먼 태도이며 따라서 당연시하기보다 마땅히 따져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그러한 규명을 위해서도 우선 알아야 할 것은 알제리전쟁의 지적 청산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이 현상은 어떠한 계보를 갖고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또한 문제가 프랑스 내부에서만 발생하지 않았고 어디까지나 지중해 넘어 알제리에 결부된 만큼11) 이러한 지적 담론을 내어 놓는 현실적이며 사회적인 구조를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지식이 얼마큼 사회의 반영인가, 아니면 반영이기보다 사회를 끌고 가는 것이 지식인가 하는 사회학자 아마드 사드리의 질문은 과거청산의 영역에 동원되어도 긴요하게쓰일 것이다.12)
1. 1950년대의 비판과 항의
이미 1952년에 샤를-앙드레 쥴리앙이 북아프리카의 행진에서 설명했고 다시 2차 세계대전 전쟁기의 상황만 별도로 연구되었듯이13) 북아프리카 민족주의는 2차대전의 참전을 통해 대내외적으로 분명하게 대두했다. 알제리도 인구의 10분의 1인 유럽계가 토지와 생산 이윤의 절대 가치를 점령하도록 하고 10분의 9인 모슬렘은 법적으로 하등 인간 취급을 해 온 프랑스의 식민 정책이 변할 것을 요구하고 기대했다. 그들은 식민 종주국에 대해 일방적인 선의를 기대한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군단의 피와 희생에 대한 대가를 요구한 것이었다.14) 그러나 1945년 5월 8일 세티프(Stif) 시위에 대한 대규모의 진압작전이 말해주듯이 프랑스는 정치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