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무용
1. 근대무용, 신무용기의 시대적 배경
우리나라에 외래문화가 대대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말(1876년) 강화도 조약을 그 시발점으로 볼 수 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본은 31운동을 계기로 식민통치 방식을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꾸게 되었으며, 이 때 문화정책이라는 명목으로 서양문물과 문화가 비판 없이 무차별하게 유입되었다. 이에 따라 전통의 고수와 외래문화의 수용이라는 상충적인 갈등이 확대되는 가운데 우리의 근대무용, 신무용은 전개되었다.
우리나라에 신무용이 처음 소개된 것은 1926년 3월 일본 든대무용의 선구자라고 불리웠던 이시이바쿠의 내한공연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제국극장 오페라단 제1기생으로 무용에 첫발을 딛은 이래 1922년부터 1925년까지 유럽 유학을 다녀온 이시이 바쿠의 무용은 당시 새로운 형태의 신흥무용으로서, 신무용이라는 용어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시이 바쿠는 초창기에는 서양의 현대 춤을 추었지만 이후 일본 전통무용을 익혀 전통을 가미한 새로운 형태의 독특한 무용 양식을 창출하였다. 우리나라에는 1926년 처음 공연을 가진 이래 두 차례에 걸쳐 그의 무용세계를 소개한 바 있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수인(囚人)’은 자유를 빼앗긴 것에 대한 분노와 번민을 다룬 작품으로 전위적 성격으로 주목을 끌었으며 작품 ‘실념(失念)’에서는 조선을 상징하는 흰 옷의 무대의상을 입고 독무로 출현하여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시이 바쿠의 서울공연은 다음의 몇가지 측면에서 한국 근대무용의 전기를 가져다 준 하나의 사건이었다.
첫째, 용어상에 있어 무도(舞蹈)라고 불리던 것에서 무용(舞踊)이라는 새로운 용어로 대체된 점을 들 수 있다. 둘째, 서구식 극장무대에 창작무용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셋째, 익명의 춤꾼에서 무대 예술가로서의 의식의 생성을 들 수 있다. 넷째, 동양적 춤 교류에서 본격 서양춤이 유입되었다는 점이다.
2. 신무용의 개념
신무용의 개념…(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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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한국무용의 창조를 지향하는 무용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 전자는 이시이 바쿠의 현대무용을 ‘새 무용’이라는 의미로 해석하여 도입한 것들이라 할 수 있고, 후자는 해방 후에 나타난 새로운 경향의 하나인 민족정서에 바탕을 두고 서구의 무대기법과 춤의 형식을 접목시킨 것들이라 할 수 있다.
1928년 배구자는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의 개인무용 발표회를 가졌다. 2년 뒤 그는 일본 순회공연을 하여 각광을 받기도 하였다. 1932년에는 최승희가 우리나라 춤을 현대무용 기법으로 창작하여 제2회 발표회를 열었고, 1934년에는 조택원의 창작무용 발표회가 있었다. 이들 무용발표회를 효시로 하여 위나라의 무용가들이 국내외에서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최승희는 그의 초기 대표작 ‘에헤야 노아라’를 발표한 뒤 수많은 작품을 창작하여 전국에서 순회공연을 하였으며 조택원은 ‘승무의 인상’등의 작품으로 우리나라는 물론, 유럽 여러 나라에서 순회공연을 하였다. 1946년에는 조택원을 위원장으로 조선무용예술협회가 결성되어 의욕적인 움직임을 보였고, 1953년 환도 이후에는 김백봉, 임성남, 송범, 김진걸 등의 신인들이 등장하여 극장무대를 중심으로 활발한 창작 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4. 신 무용가들의 활동
① 한성준
한성준(1874~1942)은 1874년 6월 12일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6,7세부터 그 당시 장안에서 민속무용과 줄타기로 유명했던 외조부 백운채(白雲採)에게서 춤추기와 북치기를 배웠고, 곧잘 남들 앞에서 춤을 추어 보이기도 하였다. 그의 춤에 대한 재능은 탁월하여 일찍부터 인정받았다고 한다.
그는 14세가 되면서 줄과 재주, 춤과 장단을 배웠고, 이미 17세 때부터 장악원의 명고수가 되어 5년 동안 15차례의 창방(唱榜, 콩쿠르)을 치르는 등 춤과 더불어 북장단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20대에는 동학란에 가담하기도 하고 민속놀이판을 돌아다니면서 재주를 부리는 등 유랑생활을 계속하다 마침내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