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유가사상에서의 예(禮)와 인(仁)
1. 들어가며
유가의 창시자는 공자이다. 공자의 학문을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고 한다. 자기의 완성을 추구하는 학문인 것이다. 이에 반해 위인지학(爲人之學)은 남을 이기기 위한 학문을 일컫는다. 자기의 본질적인 성향을 살려내는 것보다 더 자기 자신을 위하는 길은 없을 것이다. 공자의 입장에서 볼 때 사람의 가장 본질적인 성향은 인(仁)이다. 그러므로 공자가 추구한 학문의 목표는 어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2. 유가의 생성배경
그럼 어떻게 공자는 어진 사람을 추구하게 되었을까?
중국의 고대사회는 주(周)나라 때 기본적인 틀이 마련되었다. 주나라 무왕이 상(商)나라를 멸망시킨 뒤 광대한 토지를 그의 형제, 일가, 친척, 그리고 동맹에 참여한 씨족들에게 분봉하였다. 그들의 대부분은 주천자(황제)와 동성인 희씨가 대부분이었고, 이들은 “대대손손 서로 해치지 말자”고 맹약하고 혼인관계로 유대를 다졌다. 또한 제후들은 그들의 토지를 다시 경대부들에게 나누어주면서 혈연관계를 다시 맺었다. 이런 혈연을 매개로 하여 만든 제도가 종법제도이며, 이 제도를 뒷받침해준 것이 예(禮)이다. 이렇게 300여 년 동안 안정된 사회를 이룩하였으나, 여왕 때부터 나라가 기울기 시작했다.
이후 중국은 군웅할거의 난세에 빠져들었으며, 기원전 679년에 제나라 환공이 등장하여 국력을 팽창시키자 그에 위협을 느낀 국가들이 긴장하면서 국가들 사이의 경쟁이 치열해졌다. 이러한 경쟁으로 52개국이 멸망하고 셀 수 없이 많은 제후들이 사직을 지키지 못하고 도망하였다. 이런 형세하에서 각국의 정권은 국군(國君)으로부터 점차 경대부들에게로 넘어갔고, 기원전 532년엔 진씨가 강씨를 밀어내고 제나라의 실권자로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기원전 562년에 삼분공실에 의해 노나라의 실권이 공실을 떠나 삼환에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어지러운 사회현상에 뜻 있는 지식인들은 심…(생략)
3. 禮에서 仁으로
1) 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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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었던 것이다.
3. 禮에서 仁으로
1) 禮
예의 본래 의미는 일상의 생활 질서에 있으므로 예에는 질서라는 관념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일체 질서의 내용이 모두 리(理)에 의거해서 변화되어야 하는데 이 리가 공자가 말한 ‘의’ 이며 이것이 바로 ‘예’의 기초이다. 예의 가치에 대한 공자의 규정은 이것보다 한 단계 높은 인(仁)에 있다.
예(禮)란 무엇인가?
옛날 사람의 해석에 따르면, 禮, 履也 - 예란 밟는 것이다. 즉 행동거지 밟는다는 것은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즉 사람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 규범이나 반드시 이행하여야만 하는 책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예라는 것은 외적으로 어떤 제도가 되면 예법(禮法) 또는 예절(禮節)이 되고, 내적으로 갖추는 마음가짐이 되면 도덕관념이 되는 것이다. 즉 예란 외적으로는 예법이나 예절이 되고, 내적으로는 도덕이 되는 셈이다.
옛 중국의 사회 구조는 노예주 귀족과 평민 그리고 노예라고 하는 두 계층의 대립으로 이루어진 서양의 희랍이나 로마와는 달리 촌수의 멀고 가까움으로 결정되는 혈연관계와 상하가 분명하게 줄그어진 등급관계가 화기애애하게 융합된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주나라 왕조(周王朝)가 바로 그러했다. 주왕조의 구조를 분석해보면, 형과 동생, 즉 종파로 나뉘고 혼인으로 상호 연결되며, 적자와 서자로 차별을 두는 등, 거대한 혈연 피라미드 형태의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피라미드의 꼭대기와 중간 그리고 밑바탕 사이에는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고 층층이 서로 압박하면서도 상호 의존하는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처럼 복잡다단하게 얽혀있는 상호 의존관계가 혼란스럽지 않게 유지시켜주는 기제(메카니즘:operating system)가 바로 종법제도(宗法制度)이며, 이 종법제도를 다른 말로 하면 바로 예이다.
이렇게 본다면, 예라는 것은 그 내용이 실로 광범위하다. 그 중에는 당연히 혼인제도도 포함되는데, 이것은 인척간의 결혼으로 윤리질서가 파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