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식 산맥표기에 대한 역사 지리적 연구
I. 서론
민족주의-전통주의적 차원에서의 백두대간식 표기 복원의 필요성 등이 주장된 일이 있다. 그 외에도 이에 유사한 주장과 백두대간 논의가 다양하게 언론수단을 통해 표출되어오고 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주장과 논의는 언론의 자유, 탐구 및 사유의 자유 등이 보장되어 있으므로 일단은 바람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韓國地理를 가르치고 한국지리론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地理學者의 입장에서 이러한 주장들을 대하고 읽어보면 몇 가지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첫째는 깊은 학문적 논구와 用語使用의 적절성에 대한 신중한 검토결과 등에 바탕을 두고 주장이나 논리가 제시되었으면 좋겠는데,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둘째는 그같은 제시나 주장들이 무슨 `붐`처럼 번져가고 있고, 일부에서는 그 제시나 발표가 紙上을 통해서든 방송에 의해서든 경쟁적으로 행해지는 감마저 있다는 점이다.
`백두대간`의 개념, 용어, 내용, 사용 타당성 등이 전문적인 관계 학계나 학자들에 의해 깊이 있게 탐구 검토된 연후에 그 사용이나 소개가 널리 보급되어야 바람직한데, 지금까지는 아쉽게도 이점이 그렇지 못하였으며, 설사 관계학계의 一員이 언론매체를 통해 백두대간 관계 주장을 펴더라도 그 주장은 신중하고도 비판성 있게 이루어졌어야 좋았겠는데, 그 신중성이나 비판성이 부족함이 적지 않았다. 또한 학문적 주장이나 제시가 유행이나 유행을 타는 장사처럼 붐을 일으키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한편으로는 바람직한 일은 못된다는 것이 필자의 평소 생각이다.
본 고에서는 `백두대간`식 산맥표기의 출현, 특징, 사용기간 등을 밝힐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백두대간`식 산맥 표기란 [山經表] 등에 표기된 `백두대간`, `장백정간`, `한북정맥`, `낙동정맥` 등처럼 산맥들을 ` 대간`, ` 정간`, ` 정맥`처럼 표기한 것(그린 것 포함)임을 말해 둔다.
탐…(생략)
1) 최초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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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잡을 수 있고, 언급한 사람으로는 于必興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숙권의「패관잡기](16 세기 중반) 중 다음과 같은 관련 문장이다.
"고려 공민왕 때 司天少監 于必興이 상서한 말에 `우리 나라(지세)는 白頭에서 시작하여 지리에서 끝났는데, 그 지세가 물의 근원(水根) 나무의 줄기(木幹)처럼 생긴 땅입니다. 검은 것으로 부모를 삼고 푸른 것으로 몸(身)을 삼았으니 土에 순응하면 번창하고 거스르면 재앙을 입습니다. 금후에 문무백관은 風土에 순응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더니 王이 그것을 따랐다."
다음으로 백두대간을 거론한 사람은 李重煥으로 볼 수 있고, 바로 그의 [택리지](1751)에서였다.
"백두에서 함흥까지는 산맥이 복판으로 내려왔다. 동쪽 지맥은 두만강 남쪽으로 뻗어갔고, 서쪽 지맥은 압록강 남쪽으로 뻗어갔다. 서쪽 지맥은 길게 칠팔백리까지 뻗었으나 동쪽 지맥은 일백리 미만이다. 大幹은 끊어지지 않고 옆으로 뻗었으며 남쪽으로 수천리를 내려가 경상도 太白山에까지 통하여 하나의 脈嶺을 이루었다. 태백산에서 영등성이가 좌우로 갈라져 우편 지맥으로 소백(산)에서 남쪽으로 내려간 것은 소백(산) 아래에 있는 화령 덕유(산) 남쪽에 있는 육십치와 팔량치가 大嶺이며 여기를 지나서 지리산이 된다."
"지리산은 南海가에 있다. 이 산은 백두(산)의 큰 맥이 끝난 곳이므로 일명 頭流山이라고 한다."
위 글 내용을 살펴보면 이중환은 조선의 산세를 논하면서 백두산에서 시작한 산맥들로는 2개의 枝脈과 하나의 大幹이 있음을 지적하였고, 그 중 대간은 남쪽으로 뻗어가다가 다시 좌우 2개의 지맥으로 갈라졌으며, 다시 그중 右脈(西脈)이 지리산에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지리산은 大脈이 이어져 흘러오다(頭流)가 끝나는 곳으로 보았던 것이다.
위 글에서 우리는 이중환이 내세운 2개의 주장을 알 수 있다. 첫째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단절 없이 태백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