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鄭道傳)
정도전은 革命家였다. 革命이란 命 즉 天命을 바꾸는 일이니, 그것은 하늘이 할 일을 사람이 대신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라를 세우는 것이 하늘의 도움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생각될만큼 어려운 일이듯이, 나라를 바꾸는 일도 또한 그만큼, 아니 그보다 더 어렵다고 할 것이다. 정도전은 그 혁명을 우리 역사에서 가장 완벽하게, 가장 아름답게, 상황과 이론과 실천이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혁명을 일구어낸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詩란 무엇일까? 그는 고려 후기의 문약한 시들에 반감을 가졌다. 그는 한편으로는 “詩詩한 詩”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그러면서도 250편 가량의 시를 남겼다. 그의 시는 그 앞의 시들과 다를 것이다. 정도전을 통해서 시대 속에서 시의 의미, 정치가 혁명가에게 있어서 시의 의미가 어떠한 것이어야 할까 나름대로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우선 그의 시대와 그의 일생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야야 할 것이다.
그 전에 그의 시대가 엄청난 亂世였다는 점을 주지하고 있어야 한다. 원나라의 식민지였던 피해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북의 홍건적과 남의 왜구의 격렬한 약탈에 시달렸다. 그런데 권문세가는 나라를 지키는데 속수무책이었으며 불교는 갈데까지 부패해 있어서 그 고통을 모조리 백성들이 감당하고 있을 대였다. 그야말로 外憂內患이 겹으로 닥치던 시대였다.
鄭道傳은 1342년에 태어나서 1398년까지 살았다. 지금은 영주시에 속하는 경북 봉화 사람이다. 외가였던 충청도 단양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단양에는 도담삼봉(島潭三峰)이 있다. 이 지역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이 젊었을 때 만난 관상쟁이가 예언하기를 10년 후에 결혼하면 재상이 될 아이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정운경은 이 말을 믿고 10년 간 금강산에 들어가 수양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도담삼봉에 이르러 비를 만나 길가 어느 초막집에 유숙하게 되었다. 거기서 우씨女를 만나 아이를 얻게 되었다는 것이…(생략)
|
몽주?이 숭인?이 존오 등과 더불어 성리학을 강론하면서 자신의 학문적 이해를 깊이하였다. 이때는 바로 대륙에서 원(元)?명(明)이 교체되는 시기로서 공민왕은 안으로 유교를 부흥하여 중앙집권적 관료정치를 재정비하고, 밖으로는 반원 친명(反元親明) 정책을 표방하면서 몽고로부터의 완전 독립을 꾀하고 있었다. 정 도전을 비롯한 신진 성리학자들은 아직 뚜렷한 정치세력을 형성하진는 못하였으나 공민왕의 개혁 정치에 소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미래의 경륜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러나 1374년에 우왕(禑王)이 즉위하고 이 인임(李仁任) 일파가 집권하면서 정세는 크게 바뀌었다. 친원 반명정책에 반대하던 정 도전은 마침내 고달픈 유배길에 오르게 되었다. 처음에 나주 부근의 회진현(會津縣)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고향에 4년간 복거하다가 다시 삼각산(三角山)?부평?김포 등지를 전전하면서 학문과 교육에 종사하였다. 이때 삼각산 아래에 三峰齋를 짓고 호를 三峰이라 했다고 하기도 한다. 우왕 9년에 함주(咸州)로 찾아가 이 성계와 만날 때까지 10년간에 걸친 유배?유랑생활이 정 도전에게 있어서는 가장 고달프면서도 가장 의미 있는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우왕 9년, 이성계를 찾아간 이후의 정 도전의 생애는 그대로 조선 왕조의 建國史이다. 당시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로 있던 이 성계의 막하에 들어간 것은 무엇보다도 역성 혁명(易姓革命)에 필요한 군사력을 얻기 위한 것이었던 듯하다. 실로 조선 왕조 개창에 있어서 군사적인 기여가 가장 컸던 것은 이 성계이며, 사상적인 기여가 가장 컸던 것은 정 도전이다. 그는 자신과 이 성계와의 관계를 한(漢) 나라의 장양(張良)과 고조(高祖)와의 그것에 비유하면서 ‘한 고조가 장양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양이 한 고조를 이용하였다.’고 취중에 왕왕 토설하였다고 한다.
우왕 14년(1388) 6월에 이 성계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정권을 잡게 되자, 그는 전제개혁에 의하여 경제권을 장악하고, 군제 개혁에 의하여 군사권을 장악한 다음 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