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李奎報)
우선 간략히 이규보의 일생을 따라가며 그의 문학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규보가 태어난지 이태만에 무신란이 있었다. 세 살배기 어린아이에게 그런 역사적 사건에 대한 어떤 인상이 남아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청년기에 무신란을 겪었던 문신의 자손들과는 출발점부터가 달랐으리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뿐이 아니라 그의 집안은 구귀족에 속할만큼 대단하지도 않았다. 대대로 경기도 여주지역의 향리로 있다가 오히려 무신란 후에 중앙으로 진출할 기회를 얻었던 집안이었다. 아홉 살 때부터 이미 문장을 짓기 시작했으며 열네 살에는 최충의 문헌공도에서 수학하였다. 그러나 과거 사마시에 세차례 낙방하고 22세에야 비로소 합격하였다.
이 시기 열 여덟살의 이규보는 이미 문명을 떨치고 있어서 53세의 오세재 - 그는 당시 죽림고회의 어른으로 이름이 높았다. - 가 그를 집으로 찾아와 만나게 된다. 만나서는 열흘이 넘도록 함께 지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세재는 그의 재능에 감동해서 나이를 잊은 친구(忘年友)가 되자고 했다한다. 그는 오세재를 따라 약 3년간, 이인로도 중심에 있던, 죽림고회의 문인들과 교유했다. 그러나 그들 죽림고회 7현중 한사람이 죽어, 그 회에 들어오라는 권유를 받자, “칠현이 조정의 관직인가? 빈 자리를 채운다니”하고 일언에 거절했다. 그리고는 다음의 시를 써서 기롱했다.
榮參竹下會 (영참죽하회)
快倒甕中春 (쾌도옹중춘)
未識七賢內 (미식칠현내)
誰爲鑽核人 (수위찬핵인)
榮은 영광되다는 말이다. 參은 참이라고 읽어서 참여한다는 뜻을 나타낸다. 竹下會는 대나무 아래의 모임이니, 중국이 죽림칠현을 본딴, 고려의 죽림칠현을 자처하는 모임을 가리킨다. 대나무 아래 모인 모임은 왠지 세속에서 초월한 듯한 느낌을 준다. 快는 상쾌하다 할 때의 기쁘다는 뜻이고 倒는 거꾸로한다는 것이다. 甕은 항아리, 中은 가운데이고 春은 봄이다. 항아리 안의 봄을 즐겨 기울였…(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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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주로 소일하며 예절을 무시하는 그를 최충헌은 좋지 않게 생각했다. 그 점을 불식시키고 관직을 구하는 글을 여러차례 썼다. 그러던 중 나이 마흔이 되었을 때, 최충헌의 새로 지은 정자를 소재로 한 글을 지은 것이 그의 마음에 들어 벼슬을 얻기 시작했다. 마흔여섯에는 최우가 마련한 자리에 미관으로 참석했는데, 이인로가 운을 부르는대로 40운이 넘는 대작을 즉석에서 지었다. 최우가 감탄해서 아버지 최충헌에게 알리고 최충헌 앞에서 다시 금의가 40 여 운을 불렀는데 즉석에서 시를 이루었다. 이 놀라운 재주에 최충헌은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하여튼 이 사건으로 그는 벼슬을 얻게 되는데, 어떤 관직을 원하느냐는 물음에 ‘지금 8품이니 7품이면 족합니다.’ 하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부터 벼슬이 계속 높아져서 70세까지 화려한 관직을 영위하다가 74세에 죽었다. 그의 묘는 지금 강화도에 있다.
그의 삶에서 주목할 것은 네 가지이다. 첫째 그는 관직에 대해 대단히 긍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둘째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셋째 농민의 삶의 실상을 드러내는 시를 지었다. 넷째 시를 정말 사랑했다.
위에서 보았다시피 그는 관직에 집착했다. 이는 이인로가 관직을 얻고자 했으면서도 관직에서 초연한 모습을 이중적으로 보였던 것과 다르다. 이인로에게 관직은 과거 가문의 영화를 되살릴 수 있는 출세의 수단이었다면, 이규보에게는 자기의 세계관을 실현해 볼 수 있는 수단이었다. 관직은 객관적인 일자리이다. 자신의 세계관을 객관적으로 검증해볼 수 있는 실험장소라는 것이다. 그것은 구귀족이 주관적 마음의 종교인 불교를 숭상했던 것과 다른 태도라 할 수 있다. 이규보의 생각은 보다 객관적인 사물의 세계, 사물의 도의 세계를 추구했고, 그 객관화의 객관적 증거가 관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자기 혼자서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굴어도, 실제로 實務를 아는 것은 아니다. 실무를 통해서 도를 구현한다는 것은 굉장히 새로운 생각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이를 그는 ‘物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