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名將) 고선지(高仙芝)
이방에서 이름을 떨치다가 죽임을 당한 고구려 후예
화청궁(華淸宮)은 현종(玄宗)이 양귀비와 처음으로 만났던 장소로 유명하다. 현종은 수시로 이곳에 행궁하여 속된 말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무엇이 현종의 머리를 아프게 했을까?
이 문제는 결과적으로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도 관련이 있다. 알다시피 안록산난은 통치계급내의 권력투쟁이 빚은 전쟁으로 볼 수 있다. 안록산난을 이해하는 데는 호장(胡將) 등장의 시대적 배경과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아울러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에는 오랑캐 장수(胡將)가 변방의 방위를 전담하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역사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이임보(李林甫)는 장기적으로 재상 자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변방장수는 중앙의 재상직에 들어올 수 없다’는 제도를 만든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이른바 ‘두절출장입상(杜絶出將入相)이 그것이다.
이 제도는 병권장악이란 측면에서 보면 이임보가 자신의 지위만을 지키기 위해 짜낸 변법(變法)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현종이 실제로 중요시한 것은 병권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때 이임보는 오랑캐[胡將]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고 진언하였는데 그 이유는 오랑캐는 ① 용감하다는 것, ② 글자를 모르니 조정대신들과 결탁하기 어렵다는 것 등이었다.
이같은 제도는 당(唐)나라 초기부터 채택되어 온 호인에 대한 중용책과 병행선상에 있었기 때문에 파격적인 변화로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현종은 병권을 누구에게 맡기는 것이 조정의 안전을 위해 유리한가를 저울질했을 뿐이다. 한번은 왕충사(王忠嗣)에게 사진절도사(四鎭節度使)를 겸임시켰을 때 중신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그가 병력을 가지고 태자(太子)를 옹립할 것이라고 고자질하였던 사실이 있었기 때문에, 현종은 군벌이 조성되지 않는 방안이라면 타당한 제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절도사가 한곳에 오랫동안 부임해 있음으로써 부병(府兵) 대신…(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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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 있다. 또 현종이 변방을 안록산에게 완전히 의탁할 때 화청궁으로 그를 불러들여서 융숭하게 연회를 베풀고 화청궁 근처에 저택을 하사한 점도 용인술의 일환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할 때 고선지(高仙芝)도 이곳 어디에 초청되어 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되어 왔다.
그러면 다른 변방 장수와 대등한 위치에 서는 고구려의 후예인 고선지에 대해 알아보자.
고선지를 고구려인으로 보는 자료로는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등이 있다. 『구당서』와 『신당서』의 고선지전에는 명확히 고구려인이라 하였다. 또 『구당서』와 『자치통감』에는 선임 안서절도사 부몽영찰(夫蒙靈察)이 고선지가 세운 전공을 시기한 나머지 ‘개똥같은 고구려놈()’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고 전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資治通鑑』 卷 216 참조). 호삼성(胡三省)이 『원화성찬(元和姓纂)』에 단 주(注)를 보면, ‘부몽(夫蒙)’이라는 성(姓)은 본래 서강인(西姜人)이라고 하였다. 당시 중국에 동화한 이민족간에는 서로 욕을 할 때 종족적 멸시를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한 예가 안록산과 가서한(哥舒翰) 사이에서도 보이는데, 멸시의 기준은 한화(漢化)의 정도에 두고 있다.
고선지의 전적(戰績)은 한화(漢化)된 호장이나 다른 주위 사람들로부터 시기를 받을 만큼 빛났다. 마지막 참형을 당했을 때도 이러한 시기가 배후에 깔려 있었던 듯하다. 사서(史書)에 따르면 그는 말숙한 용모로 무장(武將)답지 않게 수려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사계(舍溪)는 그가 유완(儒緩)함에 늘 근심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일을 처리하는 데는 영민하고 도량이 넓고 용감하였으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 일찍부터 하서군(河西軍)에 예속되어 중급 장교로 있다가 사진교장이 되었다고 전한다. 20여 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를 따라 안서로 갔다. 거기서 아버지의 군공(軍功)을 입어 유격장군이 되었다. 그후에는 아버지와 같은 반열에 서게 되었다고 하여 『구당서』와 『신당서』는 모두 그를 보통 사람이 아닌 것으로 서술